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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여름, 김동하

by noir_ 2020. 6. 6.

(p.11) 여기서 더,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싶은 밤이었다 아픈 가슴을 문지르자 총알 몇 발이 깊은 속에서 만져졌다 나는 예고도 없이 너를 생각했다 너와 나 가운데 누구를 먼저 쏴야 할까 수도세 미납 통지서에 네 이름을 끼워 넣다가 울고 말았다 슬펐던 건 네가 아니라 더 이상 세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시절은 가난했다 궁핍은 전능했고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버리고 싶었는데 왜 네 이름이 가슴에서 툭툭 떨어져 나갔는지 왜 글 때문에 잃었던 너를 떠올렸는지 내가 읽던 시집에도 듣던 노래에도 그러니까 나의 하루 곳곳에는 네 이름이 끼워져있었고 내 상처의 크기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라던 네 앞에 서서 계절 내내 앓고 싶었는데 뒤늦게 너의 현관을 두드리고 싶었는데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우리 앞에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누구를 쏴야할까 누구를 쏴야 이 죽음같은 치정이 막을 내릴까 총알 몇 발을 뒤적거리자 너의 가슴이, 외로운 심장이, 내 속에서 만져졌다 슬펐던 건 가난도 글도 아닌 네 이름이었음을

총상을 입고 전진하는 최후의 전사처럼, 한쪽 다리를 절며

세상의 벼랑으로 흐르고 싶은 밤이었다

 

 

(p.14) 영혼이 발버둥쳤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비 때문인 줄 알았다 책상에 앉아 또 글 써야 되는 줄 알았다 죽은 듯이 죽을 듯이 엎드려 시 읽는데 행간마다 걸려있는 네 이름이 슬펐다 어두운 내 방 쉬운 불행들이 엎질러진 내 방 오래된 화분이 너처럼 서서 울었다 영혼이 팽팽하게 당겼다 그때 안 사실이지만 내 영혼은 값싼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서점에 아니 네 속에 두고왔으니 나는 서둘러야 했다 네가 닫히기 전에 내리는 것이 비인지 후회인지 분간도 못할만큼 서두르며 뛰어야했다 뛰어가서 네 앞에 서고 싶었다 다정도 병처럼 앓는 너에게 다정만 내려놓고 모든 병 나에게 달라고 빌며 울고싶었다

 

(p.18) 무너져도 좋으니 내가 불행을 더 주세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퍼붓는 빗줄기를 따라 너는 떠났다. 마른 두 다리로 추적추적 물길을 내다 모퉁이를 도는 것으로 너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너와 나 사이에 자란 어떤 악마의 형상을 선명하게 목격하던 밤, 전파사 녹슨 간판 밑에 숨어 서로의 어두운 하늘을 접고 있던 너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알 수 없다. 불행의 흉내라는 말이 싫어 탕녀와의 육체 잃은 사랑을 생각했고 발을 맞대본 사이에 관한 어렸을 적 미신도 가끔은 믿고 싶었다. 그때마다 네 이름이 내 속에서 덜그럭거리며 제 위치를 수없이 바꾸고 있었지만 덜그럭거리는 임종 같던 내가, 떠날 수 없는 네 속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어야했다. 나는 나보다 십수년은 더 살았으니 사랑보다 이별이 필요했다고. 이제 와서 나는 무너질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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