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귀71

장수양, 사랑의 조예 사랑의 조예 그는 멸종한 식물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맡고 싶어 전화로 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난 달려가 그의 집 앞에 무릎을 꿇고 언 밤을 기다렸다 흰옷을 입은 그가 밖으로 나왔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발끝이 둥글게 닳아 있었다 한참 뒤에야 목소리가 들렸다 이 식물은 오래 물위를 달려왔어 가는 리와 새처럼 활동적인 부레를 달고 간혹 노래도 불렀어 하나뿐인 잎에 긴 끈이 달려 하늘손이 쥐고 이끄는 게 아닐까 생각해봤어 한때는 떼 지어 이동한 몸이었지 함께여도 물에는 슬픔이 비치지만 자신의 숨소리는 듣지 않아도 돼 바깥으로 달리는 식물의 이야기야 아직 달리고 있는지 다시 무리를 지었는지 이후를 듣기 위해 나 매일 빌고 있어 반복하여 찾아가고 있어 사람들은 내게 깊은 물밑에서 나와 잠수를 그만두고 더.. 2021. 8. 14.
장수양, 연말상영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 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 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을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자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른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이런 걸 .. 2021. 8. 14.
김승일, 1월의 책 잠이 외면이라고 생각하니 너의 불면증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런 너의 불안함을 외면하는 사람들이랑 놀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 아무도 안 오고 너만 왔으면 좋겠다. 김승일, 1월의 책 2021. 1. 14.
로제타, 스무 살의 무덤, 방주 흐린 신에 대고 함부로 기도하는 치기 어린 습관이 있다 아득한 너이므로 굳게 신앙한다 결속과 이상을 전제로 믿을 무엇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아가냐며 온기 한 조각 닿질 않는 기도를 하며 의심했다 그래서 신은 과연 있을까 이렇게 공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데 오늘 예배에선 단념했다 결과론은 묵념한 채 너의 온전한 신도가 되자고 기도의 막문은 사랑해였다 오늘도 부디 누군가를 사랑하소서 내 종교는 사이비다 닿지 않는다 2021. 1. 14.
이훤, 반복재생 밤을 겉돈다 꿈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왜 하나같이 내 것이 아닐까 2021. 1. 14.
윤애라, 첫사랑 이제는 잊으리 두 눈 감고 수만 번 되뇌이지만 눈을 뜨면 어느 곳에 잘 걸려 있는 액자처럼 그대는 내 벽 속에 있다 비로소 잊혀졌다 싶으면 빛바랜 노래로는 피어나고 세면대 비누 향기로도 피어난다 그대는 망각의 늪을 지나고 모든 사랑을 끝냈는데 그대는 여전히 내 벽 속에 갇혀 있다 아직도 나의 사랑을 건드리고 있다 2020. 11. 23.
신정민, 눈빛 나선형 꼬리를 가진 행성이 궤도를 이탈한다 별하나 희미한 낮달과 구르다 멈춘 구슬 너의 빛나는 눈동자와 외투에 달린 둥근 단추의 초점을 따라간다 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지상에서의 마지막 북극성이 이루어지고 가로등은 꺼진 직후의 어둠 속에서 새벽을 불러온다 목이 긴 장화 속 자궁보다 컴컴한 곳에서 어느 한 순간이 더듬거리며 빛나고 있다 나의 항성 너를 둘러싼 나이 성단이 회전한다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언어는 나무들의 것이라서 하늘을 향해 다가갈 뿐 흙을 조금 더 움켜쥘 뿐 침묵보다 슬픈 너의 눈빛으로만 나를 기록한다 네가 나를 읽는 동안 말 없이 외로워지기로 한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 방황 흔들림으로 반짝이고 마는 고독이 겨울 별자리의 오리온인 듯 다가온다 둥근 자전이 시작된다 2020. 11. 23.
박완호, 황홀한 저녁 네가 되게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어둠이 밀려오는 속도를 따라 너의 자리가 조금씩 흐릿해진다 잔고를 다 털어낸 은행 너머 두 줄기 연기가 꽈배기를 틀고 있다 서녘을 물들이는 건 노을만은 아니었음을, 12월 저녁을 지나는 새들은 제 이름을 모르는 이에게도 쓸쓸하게 빛나는 음악을 남긴다 저들이 가는 쪽이 네가 있는 곳이다 가으내 번민하던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곳, 갑자기 바람이 세어지고 나무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그쪽 어디엔가 네가 서 있는 까닭이리라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젖혀진다 곧 세상이 다 어두워지고 서로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게 되면 형형색색의 눈을 치켜뜨고 네가 사방에서 다가올 것이다 2020. 11. 23.
진은영,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2020. 11. 23.
이현호, 봉쇄수도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지만 완벽을 위해 그 문장을 남기지 않는다 술 취한 천사에겐 천사의 몫을 오래 굶은 귀신에겐 고수레를 까마귀와 까치에겐 그들의 밥을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남겨두었다 그 사랑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우린 이별하지 않았을 테지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너에게 지난 것이 만날 것을 버린 것이 남은 것을 생활하니까 미문(美文)은 미문(未聞)의 사용흔이니까 모든 문을 여는 열쇠공도 돌아갈 집은 하나뿐이니까 단 하나 미문(美門)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침묵으로 돌아눕는다, 우리는 처음의 사랑을 버린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2020. 11. 23.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최승자 2020. 11. 3.
이제니. 나선의 감각-공작의 빛 꿈 없이 잠들고 꿈 없이 깨어나는 날들이다. 흐릿하고도 명확한. 명확하고도 흐릿한. 몇 개의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고요해 보여서 좋구나. 봄의 시작. 꽃들은 피어나고. 새들은 날아오르고 주어 없는 시간들.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길게 이어지다 끊어지는. 끊어지다 다시 이어지는. 네 연약한 내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시 시작되는. 노래들. 대화들. 기억들. 정화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너를 통해서 나를 본다는 것은 이런 빛깔인가. 멀리서 손 내밀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안다는 것은. 멀리서 이미 다가왔던 얼굴을 뒤늦게 본다는 것은. 기억은 중첩된 채로 펼쳐지고. 수면 위로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다. 꿈속의 꿈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꿈밖으로 사라지는 꿈들 속.. 2020. 10. 9.
박지혜, 초록의 검은 비 그가 죽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온종일 울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려면 이제부터 다른 문을 찾아가야 한다 원을 그린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를 기다린다 그가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가 행복한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착하게 밥을 먹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가 달개비꽃을 보고 소년처럼 기뻐한다 그가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작은 종을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그가 흔드는 종소리처럼 불안한다 나는 그처럼 한 번 두 번 종을 흔든다 종소리는 굳은 표정처럼 외로운 온기처럼 슬프다 그.. 2020. 10. 9.
나희덕, 불투명한 유리벽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누가 기억의 스위치를 누른 것일까 그러나 이내 네 얼굴은 꺼지고 사방에서 깨진 유리 알갱이들이 모여들었지 네가 쓰다 만 페이지, 자동차 바퀴가 멈춘 곳에서 유리벽은 자라나 점점 불투명해지고 단단해졌어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아,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아침 거기 춥지 않아? …… 어둡지 않아? ……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지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감긴 네 눈을 다시 감겨주고 닫힌 네 입술을 다시 어루만져주고 굳은 네 손과 발을 다시 쓸어주고 식은 네 가슴에 흰 꽃을 다시 놓아주듯이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어 물을 .. 2020. 10. 9.
김경미, 겹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김경미, 겹 2020.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