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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71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중 그 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최은영, p159 2020. 9. 30.
양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사람들 앞에서 웃으려 애쓰다 보니 마음을 감추는 데에 익숙해졌다 누가 안부를 물으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하염없이 낮과 밤이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이고 싶은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야가 멈추지 않았다 2018년 10월 양안다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작가의 말 2020. 9. 30.
조연호 배교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는다 ​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 ​ 조연호, 배교 2020. 8. 16.
폴 베를린느, Green Green 그린 Voici des fruits, des fleurs, des feuilles et des branches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 있소 Et puis voici mon coeur qui ne bat que pour vous.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소. Ne le déchirez pas avec vos deux mains blanches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Et qu'à vos yeux si beaux l'humble présent soit doux.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J'arrive tout couvert encore de rosée 새벽 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Que le vent .. 2020. 8. 4.
여성의 현실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의 영역 안에 숨겨져 있었다 '사생활'이라고 칭송받는 가치들은 의식에 강력한 장벽을 형성하였고, 따라서 여성의 현실은 사실상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성생활과 가정생활의 경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욕과 비웃음, 불신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여성들은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게 되었고, 여성의 침묵은 성과 가정 내의 어떠한 착취도 합법적인 것으로 둔갑시켰다. 여성에게는 사적인 삶의 포악성에 붙일 만한 이름이 없었다. 공적 영역에서 이미 잘 마련되어 있는 민주주의가 가정에서의 원시적인 폭정이나 교묘한 독재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부활하는 미국 여성 운동의 초기 선언서에서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문제를 "이름이 없는 문제"라고 부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초기 여성 운동의 방식을 '의식.. 2020. 8. 3.
박준, 희고 마른 빛 잠이 좋다. 사람으로 태어나 마주했던 고민과 두려움과 아픔같은 것들은 나는 대부분 잠을 통해 해결했다. 헤어짐의 아픔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끙끙 앓던 신열 같은 것들도 잠을 자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꿈을 부른다. 부른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이 들 때까지 한가지 생각을 계속 떠올리는 것이다. 요즘 꿈에는 당신이 자주 보인다. 꿈의 장면은 흑백이고 당신은 말없이 돌아앉아 있거나 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날에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그럴때면 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궁금한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에 바쁘다. '살 만해?' 아니 '죽을만해?' '필요한 것은 없어?' '.. 2020. 6. 6.
기형도,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2020. 6. 6.
검은여름, 김동하 너의 계절로 가는 길은 꽃이 피지 않아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었고 때로는 침침한 유곡이었다 닮지 못한 연인들의 태가 전운으로 감기던 하늘의 공백은 지난밤 나누었던 우리의 입술이었다 내 마음이 급했다 침묵처럼 높게 뻗은 편백나무 숲을 지나 빗발 따라 소쩍새 우는소리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느새 외롭고도 지친 밤중이었고 먼 곳에서 보내온 첫사랑 따위의 낯간지러운 이름들 찾아 헤매던 여름날은 끝끝내 세월 속으로 반송되지 못한 서로 마음에 대한 기록이었다 조난이었다. 불안한 입술을 달싹이며 마지막을 발음하던 네가 수화기 너머로 울고 있었다. * 깊어가는 밤을 모르고 사랑을 좇기위해 이튿날까지 뒤엉키던 몸이면 우리는 좋았다. 좋은 꿈 꾸라는 너의 말과 함께 돌아눕던 새벽들이, 맞댄 등 사이로 나눈 서로의 체온 속에서.. 2020. 6. 6.
유지원 - 첫사랑, 여름 후덥지근한 교실의 여름과 절정의 여름, 레몬향이 넘실거리는 첫사랑의 맛이 나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나던 네 머리카락, 돌아갈 수는 없어도 펼치면 어제처럼 생생한, 낡은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단편 필름들. 말미암아 절정의 청춘,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 밤이면 얇은 여름이불을 뒤집어 쓴 채 네 생각을 하다가도 열기에 부드러운 네가 녹아 흐를까 노심초사 하며, 화성인들이 사랑을 묻거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마음 먹었다가도 음절마저 황홀한 석 자를 앗아가면 어쩌지 고민하던 그러니 따끔한 첫사랑의 유사어는 샛노란 여름 2018 제 26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중등부 시 부문 동상 수상작 첫사랑,여름- 서울동국대 사대부중2 유지원 2020. 2. 3.
오은정 - 파 무질서와 불쾌의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더 예민하고 성숙해지길 갈망했다. 무질서가 더 혼란해지고 불쾌가 더 깊어질수록 누구보다 지적으로 고결하고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은정- 파 2019. 12. 23.
견디다, 황경신 붙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세상만사도 과거지사도 가는 계절도 가는 사람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긍하는 일. 오지않는 사람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보내는 시간과 그리워하는 시간 속에, 지금은 알지 못하는 소중한 것이 있을 거라 믿는 일. 오늘은 주의하고 내일은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순응하는 일. 2018. 12. 11.
백은선,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백은선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 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 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거 같 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 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 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 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 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 인을 다시 .. 2018. 12. 3.
문정영, 열흘 나비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갯짓 같다. 열흘쯤 웃다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가는 지 잊어버린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산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락에서 열흘을 다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열망을 향해 날아가는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2018. 12. 3.
유희경, 불면 그곳엔 벚꽃이 하도 핀다고 삼사월 밤이면 꿈을 꾸느라 앓고 앓아 두 눈이 닳을 지경이라고 당신이 그랬다 경청하는 두 귓속으로 바람이 일고 손이 손을 만났다 남은 기척 모두 곁에 두고 싶었던 까닭에 나는 애를 써도 잠이 들지 못했다 2018. 12. 3.
조혜은,관광지 너무 슬픈 것 같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낯선 얼굴로 네가 말했다. 어제의 문장에 머무르지 않아. 내가 말했지. 일찍 밤이 찾아오거나 혹은 영원히 밤 같은, 밤의 의미가 상실된 도시에서. 늘 서둘러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서툰 풍경의 사람들. 폭우가 몰아치는 거리를 피해 너는 집으로 달아나려 입을 벌렸고, 나는. 나를 기다렸다. 정말 무서운 건 폭우를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새로운 다리가 놓아지는 일이지. 너와 나 사이에 여유롭게 구조물을 놓으며. 준비가 되면 호흡하는 바른 방법을 배우고 호흡할 수 있길 바랐지. 너와 내가 공통의 분모를 가진 우리가 되길. 관광지처럼 빠르게 달아오르고 재빨리 잊힌 뒤 영영 그리워지길 바라진 않아. 정말 슬픈 건 관광지를 떠나 마지막을 맞는 나의 마음이었다.. 2018.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