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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

백은선, 사랑의 역사

by noir_ 2018. 12. 3.

사랑의 역사

백은선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
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
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거 같
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
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
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
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
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
인을 다시 읽었다. 그 시가 제일 좋다. 나는 그렇다.

옥수수는 은박지에 싸여 있었다. 김밥인 줄 알았
다. 그런데 옥수수였고 옥수수를 먹는 일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썩 잘 어울리니까. 그런데 거
꾸로, 돌고래 울음을 녹음하고 틀고 녹음하기를 반
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모른다. 모르지만 너무
슬플 것 같다.

오늘은 너랑 소파에 앉아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
지다가 뒤집혀버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
쩔 때는 림보에 갇혀 있는 기분도 든다. 그치만 행복
한 무엇이 무형의 뿔처럼 조금씩 자란다. 나는 현상
과 감정에 무연해지고 있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나도 생각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이후와 이후에 씌
어진 시와 그 시의 이후에서부터 다시 씌어진 이후
와…… 이것을 무수히 반복한 다음.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
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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