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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71

구현우, 드라이플라워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한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 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2018. 11. 15.
백은선, 사랑의 역사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거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 핸드폰을 보고 나는 오늘 유 캔 네버 고 홈 어게인을 다시 읽었다 그 시가 제일 좋다 나는 그렇다 옥수수는 은박지.. 2018. 11. 15.
허연, 좌표평면의 사랑 (좌표평면 같은 아일랜드의 보도블록 위를 노면전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백 년쯤 된 마찰음이 빈속을 긁고 자본주의는 싸구려 박하사탕을 빨고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숫자를 믿어왔다. 사랑은 노래가 아니라 그래프다. 환각의 정도를 나타내는 그래프. 두 명의 상댓값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 머릿속에는 수식이 흐르지만 그래프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좌표평면 위의 사랑. 힘들게 찾아온 사랑이라고 힘들게 가라는 법은 없다. 아무리 어렵게 온 사랑도 그래프 위에선 명료하다. 정점에 선 순간 소실점까지 내리꽂는 자멸 좌표평면에선 언젠가는 모두가 떠나고 새 판이 그려진다. 소중한 것을 너무나 빨리 내려놓는 재주. 이곳의 미덕이다. 계절풍이 불었다 2018. 11. 15.
구현우, 새벽 네 시 새벽 네 시에 맞춰 슬픔을 조율하다가 과거의 너를 발설한다 서울의 우울, 우울은 서울 남부지방에는 비가 온다는데 이곳에는 눈이 내린다 어제는 너에 대한 미움으로 잠을 설쳤고 오늘은 누구에게든 미워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려다 밤을 샌다 오후 네 시에도 새벽 네 시의 감정이 이어진다 고전에는 시차가 없다고 내가 그랬던가 매혹적인 서사는 과거형에 불과하다고 네가 말했던가 아이슬란드는 여름이고 서울은 겨울인데 같은 온도로 바람이 분다 세상에서 제일 마주치기 싫었던 네가 하필이면 우주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을 때 얼룩진 거울 속 나는 표정이 슬픈 것인지 표면이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쳇 베이커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재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던 낭만 내가 아는 서울에 네가 산다 네가 모르는 서울에.. 2018. 11. 15.
이토록 유약하고 아름다운 거짓, 구현우 가깝고 옅은 물결과 멀고 짙은 파도가 마주한 자리에서 불투명한 거품이 난다. 그 거품에 잡아먹히는 새가 있다. 연신 깨끗해지는 유리병이 거기에 있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어이 방파제를 넘어서 온다. 발끝이 젖는다. 섬에 있으면 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멀어지지 말아요. 당신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한다. 물결에는 영원이 있다. 그 물결에 익사하는 어류가 있다. 젖은 발이 마르기엔 이른 시간이다. 그런 우울은 증상이 아니라 일상이어서 많은 결심이 자정을 넘기지 못한다. 유리병이 깨진다면 대부분 아래로 가라앉을 것 조각의 일부는 해안으로 밀려올 것 그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면 빛에 반짝인다면 보기만 해서는 다만 아름다운 해변이라면 겨울에 더 많은 관광객이 찾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성분 중 하나는.. 2018. 11. 15.
불면, 유희경 그곳엔 벚꽃이 하도 핀다고 삼사월 밤이면 꿈을 꾸느라 앓고 앓아 두 눈이 닳을 지경이라고 당신이 그랬다 경청하는 두 귓속으로 바람이 일고 손이 손을 만났다 남은 기척 모두 곁에 두고 싶었던 까닭에 나는 애를 써도 잠이 들지 못했다 2018. 11. 15.
함성호, 낙화유수 함성호, 낙화유수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 2018. 11. 15.
그대라는 문법, 한정원 바퀴 없이 굴러가는 풍경들, 편집 되지 않고 돌아가는 느와르 필름들, 에스컬레이터의 멈춤 표시를 누르자 조각난 풍경들이 관성의 힘으로 쏟아진다 ​ 너는 오늘 두 번이나 이곳을 지나쳤지만 처음처럼 첫눈처럼 첫가을처럼 내리지 못했다 과거완료와 미래형뿐인 네가 현재가 되는 장소 찔레꽃 그물망 붉은 담장 아래 오후 한 시와 네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이십 년 걸려 나를 이해한 시간들은 동쪽에서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칠월의 태양처럼 확실하게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 나의 긍정이 불투명한 부정이 되고 만다는 것 나의 언어에서 ‘그러나’를 빼면 무엇이 생길까 너를 부르기 위해 평화를 스물한 번 미래를 열한 번 중얼거린다 전지를 끝낸 쥐똥나무가 무빙 워크로 .. 2018. 11. 14.
유희경, 지옥 지옥 - 유희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히 흘러가는 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었다 우산을 쓴 내가 그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개천가에,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긴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왼쪽 어깨에 기대 놓았던 우산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면서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오른편에 둔 우산처럼 젖어가는 나는,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그러므로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받아내고 있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저것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에 잠겨 있고 난데없이 이건 또 어떤 지옥인가 싶었다 - 『우리에게 잠시 신.. 2018. 7. 3.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서윤후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 서윤후 체온이 가물자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고요를 흥청망청 쏟으며 마음을 읽으려고 했던 날도 있었다. 가끔은 우울하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고, 슬픔은 남몰래 귀신같이 내 몸을 빌려 청승을 떨었다. 종이 위로 첨언하는 나는 지나치게 인간다워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자기 몸을 돌보게 되었고, 좀 먹어가는 것은 애써 손쓸 수 없이 딱딱해진 부분이 닿을 때, 쓴다. 쓰는 손은 차갑고 차가운 손을 응시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의 곤욕스러움을 잘 아는 것일 것. 나는 다정함을 벌칙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슬픔을 비틀더라도 양보다 크게 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웃음이 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2018. 5. 6.
조지훈 - 고사 한나절 조찰히 구르던 여흘 물소리 그치고 비인 골에 은은히 울려 오는 낮종소리. 바람도 잠자는 언덕에서 복사꽃잎은 종소리에 새삼 놀라 떨어지노니 무지개 빛 햇살 속에 의희한 단청(丹靑)은 말이 없고…… (조지훈/고사古寺) 2017. 7. 10.
조지훈 월광곡 작은 나이프가 달빛을 빨아들인다. 달빛은 사과 익는 향기가 난다. 나이프로 사과를 쪼갠다. 사과 속에서도 달이 솟아 오른다. 달빛이 묻은 사과를 빤다. 소녀가 사랑을 생각한다. (조지훈/월광곡月光曲) 2017. 7. 9.
2017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문재인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오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 2017. 5. 18.
문재인 취임사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 내딛습니다. 지금 제 두 어깨는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부여받은 막중한 소명감으로 무겁습니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대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나라입니다. 또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우리 젊은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는 역사와 국민 앞에 두렵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대.. 2017. 5. 10.
이육사 청량몽 靑蘭夢 거리에 마로니에가 활짝 피기는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젖구름 사이로 기다란 한 줄 빛깔이 흘러 내려온 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한 줄같이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내 심금(心琴)의 어느 한 줄에라도 닿기만 하면 그만 곧 신묘(神妙)한 멜로디가 흘러 나올 것만 같다. 정녕 봄이 온 것이다. 이 가벼운 게으름을 어째서 꼭 이겨야만 될 턱이 있으냐. 대웅성좌(大熊星座)가 보이는 내 침대는 바다 속보다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표류기(漂流記)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날씬한 놈, 몽땅한 놈, 나는 놈, 기는 놈, 달리는 놈, 수없이 많은 어족(漁族)들의 세상을 찾았는가 하면 어느때는 불에 타는 열사(熱砂)의 나라 철수화(鐵樹花)나 선인장들이 가시성같이 무성한 위에 황.. 2017.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