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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

검은여름, 김동하

by noir_ 2020. 6. 6.

너의 계절로 가는 길은 꽃이 피지 않아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었고 때로는 침침한 유곡이었다 닮지 못한 연인들의 태가 전운으로 감기던 하늘의 공백은 지난밤 나누었던 우리의 입술이었다 내 마음이 급했다 침묵처럼 높게 뻗은 편백나무 숲을 지나 빗발 따라 소쩍새 우는소리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느새 외롭고도 지친 밤중이었고 먼 곳에서 보내온 첫사랑 따위의 낯간지러운 이름들 찾아 헤매던 여름날은 끝끝내 세월 속으로 반송되지 못한 서로 마음에 대한 기록이었다

 

조난이었다.

불안한 입술을 달싹이며 마지막을 발음하던 네가

수화기 너머로 울고 있었다.

 

 

 

*

 

 

 

 

 

깊어가는 밤을 모르고 사랑을 좇기위해 이튿날까지 뒤엉키던 몸이면 우리는 좋았다.

좋은 꿈 꾸라는 너의 말과 함께 돌아눕던 새벽들이, 맞댄 등 사이로 나눈 서로의 체온 속에서 비밀스럽게 흐르던 차가운 전율의 까닭이 이제서야 씻을 수 없는 천형으로 선명하다.

좋은 꿈 꿔, 나는 결코 좋은 꿈을 꿀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결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꿈속엔 널려있을 것이라던 너의 암시가 그땐 너무도 폭력적이었으니. 무의식의 폭발이 지나간 자리에 틈을 만들며 다가올 내일이 두려웠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속에서 너를 잃어버리곤 했다. 오래된 마음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가난한 시절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며 미약한 나의 발밑으로 밀려왔다. 잠겨 죽는 순간까지도 애타게 너의 이름을 불렀으나, 너는 잡힐 듯 하다가도 형체없이 사라졌다.

악몽에 쫓기다 눈을 떠보면 너는 없었다. 네가 없다. 번갈아 입에 물던 젖은 담배 필터 위 선명하게 남은 네 입술도, 비 오는 날 발을 맞대고 나란히 누워 듣던 철 지난 사랑 노래도, 없다. 우리는 무엇이 급해 그토록 하나가 되고 싶었을까.

아니, 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쏟아지던 건 살갗을 두드리는 차가운 비도, 혼자 숨죽이는 너의 눈물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나였다.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나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뿐, 나를 담기 위해 들어간 깊은 너의 품속에서, 나를 잃었다. 맞물리며 서로를 찾던 몸이 네가 아닌 모든 나라는 걸 알았을 때.. 눈앞에 없는 너보다 잃어버린 내가 간절했다.

나는 너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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