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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

박준, 희고 마른 빛

by noir_ 2020. 6. 6.

잠이 좋다. 사람으로 태어나 마주했던 고민과 두려움과 아픔같은 것들은 나는 대부분 잠을 통해 해결했다. 헤어짐의 아픔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끙끙 앓던 신열 같은 것들도 잠을 자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꿈을 부른다. 부른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이 들 때까지 한가지 생각을 계속 떠올리는 것이다.

요즘 꿈에는 당신이 자주 보인다. 꿈의 장면은 흑백이고 당신은 말없이 돌아앉아 있거나 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날에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그럴때면 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궁금한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에 바쁘다. '살 만해?' 아니 '죽을만해?' '필요한 것은 없어?' '지난번에 같이 왔던 사람은 누구야?'

어느 날은 오랜만에 나타난 당신이 하도 반가워서, 꿈속 당신에게 내 볼을 꼬집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웃으며 내 볼을 손으로 세게 꼬집었다. 하지만 어쩐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꿈속에서 지금이 꿈인 것을 깨닫고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당신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힘껏 눈물을 흘리고 깨어났을 때에는 아침빛이 나의 몸 위로 내리고 있었다. 당신처럼 희고 마른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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