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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

이제니. 나선의 감각-공작의 빛

by noir_ 2020. 10. 9.


꿈 없이 잠들고 꿈 없이 깨어나는 날들이다. 흐릿하고도 명확한. 명확하고도 흐릿한. 몇 개의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고요해 보여서 좋구나. 봄의 시작. 꽃들은 피어나고. 새들은 날아오르고 주어 없는 시간들.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길게 이어지다 끊어지는. 끊어지다 다시 이어지는. 네 연약한 내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시 시작되는. 노래들. 대화들. 기억들. 정화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너를 통해서 나를 본다는 것은 이런 빛깔인가. 멀리서 손 내밀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안다는 것은.
멀리서 이미 다가왔던 얼굴을 뒤늦게 본다는 것은.

기억은 중첩된 채로 펼쳐지고. 수면 위로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다. 꿈속의 꿈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꿈밖으로 사라지는 꿈들 속에서. 물 위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음역대를 가진 소리는 서로가
서로의 몸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르고 사물을 이동시킨다. 사물의 표면을 가진 너는 음파의 감각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갑작스런 숲의 출현. 음지와 양지의 공작을 어느 날의 꿈처럼 우연히 발견하지.
반복되는 꿈속에서. 그 꿈속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다려왔던. 그 공작을. 기다리고 기다렸지.
그 길고 긴 꼬리가 활짝 펼쳐지기를. 그 날개 그늘에 얼굴을 파묻을 수 있도록. 그 모든 시간들로부터
도망쳐 남김없이 숨을 수 있도록. 숨김없이 남을 수 있도록. 그러나 유년의 뜰을 서성이던 공작은
바닷가 마을을 떠나는 날까지도 꼬리를 펼치지 않았지. 공작을 가둔 허술한 철조망 너머로 몇 개의 돌을
넣는 걸로 어떤 유년은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꿈속에서. 공작이. 그 공작이. 유년의 공작이. 음지와 양지를. 천천히. 거의 유령처럼.
거닐듯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지. 만졌지. 들었지. 그러나 공작은 여전히 꼬리를 펼치지 않았고.
이 세계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기미와 전조뿐이라는 듯이. 그 자신의 유령이 되어. 길게 길게 제 그림자를
끌고 가고 있었지. 공작은 음지와 양지의 공작은. 사라지듯 멈춰 서 있었고. 시간은 흐른다. 믿을 수 없는 말처럼.
시간은 흐른다. 바라볼 수 없는 빛처럼. 그리고. 그것이. 무언가가. 사라지듯 멈춰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멈춰 서 있듯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이 서로 다르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버렸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한순간의 빛 속에서. 맡자마자 사라지는 냄새를 붙잡는 심적으로. 번쩍이면서 아프게
눈을 찔러 오는 녹청빛 깃털의 보드라움을 부질없이 끌어당기듯이. 그러니까. 아직도 내게. 여전히 내게.
그리운 것이 남아 있었나.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어떤. 그래. 그 어떤 감정이.
잠에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울었지. 웃었지. 사라졌어. 지워졌어. 그러니까 그것은. 뭐랄까. 그것은.


이제니. 나선의 감각-공작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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