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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

나희덕, 불투명한 유리벽

by noir_ 2020. 10. 9.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누가 기억의 스위치를 누른 것일까

그러나 이내 네 얼굴은 꺼지고
사방에서 깨진 유리 알갱이들이 모여들었지

네가 쓰다 만 페이지,
자동차 바퀴가 멈춘 곳에서 유리벽은 자라나
점점 불투명해지고 단단해졌어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아,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아침

거기 춥지 않아? …… 어둡지 않아? ……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지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감긴 네 눈을 다시 감겨주고
닫힌 네 입술을 다시 어루만져주고
굳은 네 손과 발을 다시 쓸어주고
식은 네 가슴에 흰 꽃을 다시 놓아주듯이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어 물을 틀었어
뜨거운 물이 몸을 적시며 흘러내리고
성에 낀 유리벽이 천천히 녹아내렸어 희미한 네 얼굴처럼



나희덕, 불투명한 유리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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