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귀/lit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by noir_ 2020. 9. 30.

22.
어렸을 때 나는 사랑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아주 깊은 속에 있는 아주 내밀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게 옮겨주듯 말해주는 것, 비밀을 나눠 갖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는 알아듣는 것이 사랑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인 오빠들 속에서 섞여 성장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힘겹게 내 마음을 말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버렸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좀더 자라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켜줄 것인가. 새벽에 혼자 깨어날 때, 길을 걸을 때, 문득 코가 찡할 때, 밤바람처럼 밀려와 나를 지켜주는 얼굴. 만날 수 없어 비록 그를 향해 혼잣말을 해야 한다 해도 초생달같이 그려지는 얼굴. 그러나 일방적인 이 마음은 상처였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는 나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좀더 자라 누구나 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갖고 싶은 꿈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랑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거기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사랑은 영원해도 대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했을 때, 사랑이란 것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원을 향한 시선과 몸짓들이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듯이 사라져버리다니, 멀어져버리다니.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