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귀/lit

이현호, 새로 쓰는 서정시

by noir_ 2020. 10. 8.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이 밤 형광등과 별과 달과 후색(後生)의 연애까지 가닿지 못하는 종이 위엔 너뿐. 수심 장의 파지 속엔 일순 삶을 끊어낸 수백 그루 나무, 발못 잃은 수천의 새들, 쫓기는 생의 눅진함을 쉬던 산짐승의 그늘이 수만 평 젖어 있다. 그들이 올려보던 별자리가 너의 얼굴이다. 나의 아비와 그 아비의 우주에도 다만 너뿐이어서, 그리움이 낙엽 타는 냄새처럼 코끝을 울리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나의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나의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 번 찍고 가는 눈과 비. 너에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그들 몸에 아로새겨진 음양의 봄가을이 너의 향내다. 붉은 인주로 밀입국한 너의 세계는, 꺼내면 빛에 흐리고 두면 새로 찍을 수 없는 카메라 필름같이 머뭇거리고. 그 흑연색의 감광(感光)이 또한 너에 대한 상념이다. 이 너절한 몉 겁 생의 조각보로 너를 오롯이 덮고 싶었으나, 손에 쥔 날들은 허청허청 노을 속으로. 네 이름만이 내 전생(轉生)의 마르지 않는 고해이다. 그대여. 새로 쓰는 모든 서정시의 서문은 너다.



이현호, 새로 쓰는 서정시

'글귀 > l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승언, 액자소설  (0) 2020.10.09
정끝별, 끝없는 이야기  (0) 2020.10.09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0) 2020.09.30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0) 2020.09.30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0) 2020.09.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