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성 택시, 내가 사려다 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세 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열쇠 수리공은 왜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왜 패를 잘못 읽었고 시계공은 왜 깜빡 졸았을까 하필 그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 그때는 왜 하필 그대였을까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완성되는 걸까
네 졸업사진 배경에 찍힌 빨간 뺨의 아이가 나였다든가 내 어깨에 떨어진 송충이를 털어주고 갔던 남학생이 너였다든가 혼자 봤던 간디 영화를 나란히 앉아 봤다든가 한날한시 같은 별을 바라보았다든가 네가 쓴 문장을 내가 다시 썼다든가 어느 밤 문득 같은 꿈을 꾸다 깼다든가
정끝별, 끝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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