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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61

구현우, 새벽 네 시 새벽 네 시에 맞춰 슬픔을 조율하다가 과거의 너를 발설한다 서울의 우울, 우울은 서울 남부지방에는 비가 온다는데 이곳에는 눈이 내린다 어제는 너에 대한 미움으로 잠을 설쳤고 오늘은 누구에게든 미워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려다 밤을 샌다 오후 네 시에도 새벽 네 시의 감정이 이어진다 고전에는 시차가 없다고 내가 그랬던가 매혹적인 서사는 과거형에 불과하다고 네가 말했던가 아이슬란드는 여름이고 서울은 겨울인데 같은 온도로 바람이 분다 세상에서 제일 마주치기 싫었던 네가 하필이면 우주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을 때 얼룩진 거울 속 나는 표정이 슬픈 것인지 표면이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쳇 베이커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재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던 낭만 내가 아는 서울에 네가 산다 네가 모르는 서울에.. 2018. 11. 15.
이토록 유약하고 아름다운 거짓, 구현우 가깝고 옅은 물결과 멀고 짙은 파도가 마주한 자리에서 불투명한 거품이 난다. 그 거품에 잡아먹히는 새가 있다. 연신 깨끗해지는 유리병이 거기에 있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어이 방파제를 넘어서 온다. 발끝이 젖는다. 섬에 있으면 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멀어지지 말아요. 당신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한다. 물결에는 영원이 있다. 그 물결에 익사하는 어류가 있다. 젖은 발이 마르기엔 이른 시간이다. 그런 우울은 증상이 아니라 일상이어서 많은 결심이 자정을 넘기지 못한다. 유리병이 깨진다면 대부분 아래로 가라앉을 것 조각의 일부는 해안으로 밀려올 것 그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면 빛에 반짝인다면 보기만 해서는 다만 아름다운 해변이라면 겨울에 더 많은 관광객이 찾을지도 모른다. 슬픔의 성분 중 하나는.. 2018. 11. 15.
불면, 유희경 그곳엔 벚꽃이 하도 핀다고 삼사월 밤이면 꿈을 꾸느라 앓고 앓아 두 눈이 닳을 지경이라고 당신이 그랬다 경청하는 두 귓속으로 바람이 일고 손이 손을 만났다 남은 기척 모두 곁에 두고 싶었던 까닭에 나는 애를 써도 잠이 들지 못했다 2018. 11. 15.
함성호, 낙화유수 함성호, 낙화유수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 2018. 11. 15.
그대라는 문법, 한정원 바퀴 없이 굴러가는 풍경들, 편집 되지 않고 돌아가는 느와르 필름들, 에스컬레이터의 멈춤 표시를 누르자 조각난 풍경들이 관성의 힘으로 쏟아진다 ​ 너는 오늘 두 번이나 이곳을 지나쳤지만 처음처럼 첫눈처럼 첫가을처럼 내리지 못했다 과거완료와 미래형뿐인 네가 현재가 되는 장소 찔레꽃 그물망 붉은 담장 아래 오후 한 시와 네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이십 년 걸려 나를 이해한 시간들은 동쪽에서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칠월의 태양처럼 확실하게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너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 나의 긍정이 불투명한 부정이 되고 만다는 것 나의 언어에서 ‘그러나’를 빼면 무엇이 생길까 너를 부르기 위해 평화를 스물한 번 미래를 열한 번 중얼거린다 전지를 끝낸 쥐똥나무가 무빙 워크로 .. 2018. 11. 14.
유희경, 지옥 지옥 - 유희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히 흘러가는 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었다 우산을 쓴 내가 그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개천가에,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긴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왼쪽 어깨에 기대 놓았던 우산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면서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오른편에 둔 우산처럼 젖어가는 나는,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그러므로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받아내고 있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저것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에 잠겨 있고 난데없이 이건 또 어떤 지옥인가 싶었다 - 『우리에게 잠시 신.. 2018. 7. 3.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서윤후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 서윤후 체온이 가물자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고요를 흥청망청 쏟으며 마음을 읽으려고 했던 날도 있었다. 가끔은 우울하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고, 슬픔은 남몰래 귀신같이 내 몸을 빌려 청승을 떨었다. 종이 위로 첨언하는 나는 지나치게 인간다워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자기 몸을 돌보게 되었고, 좀 먹어가는 것은 애써 손쓸 수 없이 딱딱해진 부분이 닿을 때, 쓴다. 쓰는 손은 차갑고 차가운 손을 응시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의 곤욕스러움을 잘 아는 것일 것. 나는 다정함을 벌칙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슬픔을 비틀더라도 양보다 크게 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웃음이 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2018. 5. 6.
조지훈 - 고사 한나절 조찰히 구르던 여흘 물소리 그치고 비인 골에 은은히 울려 오는 낮종소리. 바람도 잠자는 언덕에서 복사꽃잎은 종소리에 새삼 놀라 떨어지노니 무지개 빛 햇살 속에 의희한 단청(丹靑)은 말이 없고…… (조지훈/고사古寺) 2017. 7. 10.
조지훈 월광곡 작은 나이프가 달빛을 빨아들인다. 달빛은 사과 익는 향기가 난다. 나이프로 사과를 쪼갠다. 사과 속에서도 달이 솟아 오른다. 달빛이 묻은 사과를 빤다. 소녀가 사랑을 생각한다. (조지훈/월광곡月光曲) 2017. 7. 9.
이육사 청량몽 靑蘭夢 거리에 마로니에가 활짝 피기는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젖구름 사이로 기다란 한 줄 빛깔이 흘러 내려온 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한 줄같이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내 심금(心琴)의 어느 한 줄에라도 닿기만 하면 그만 곧 신묘(神妙)한 멜로디가 흘러 나올 것만 같다. 정녕 봄이 온 것이다. 이 가벼운 게으름을 어째서 꼭 이겨야만 될 턱이 있으냐. 대웅성좌(大熊星座)가 보이는 내 침대는 바다 속보다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표류기(漂流記)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날씬한 놈, 몽땅한 놈, 나는 놈, 기는 놈, 달리는 놈, 수없이 많은 어족(漁族)들의 세상을 찾았는가 하면 어느때는 불에 타는 열사(熱砂)의 나라 철수화(鐵樹花)나 선인장들이 가시성같이 무성한 위에 황.. 2017. 4. 19.
양찬우,열역학 제 2법칙 벚꽃도 네 향기를 밭고 싶어했고 네가 빛나는 밤이면 가끔씩 별들도 네가 있는 창가로 떨어졌다 /양찬우, 열역학 제 2법칙 2017. 1. 28.
조해진, 천사들의 도시 감정을 꿰뚫는 언어는 없었고 그래서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무한대의 감정은 정제되고 정제되어 다만 몇 마디로만 남아 불투명하게, 불완전하게 발화되는 것이리라. /조해진, 천사들의 도시 2017. 1. 28.
삭제 작가 리스트 이 블로그의 글귀 폴더는 한 때 마음을 풀어내기조차 버거웠던 시절부터 일기처럼 사용되었던 카테고리이다. 별로 고맙지도 않은 출처표기로 자료창고 취급 해주시는 것도 짜증이 나지만 성추행 및 폭력에 연관된 위 작가들의 글은 모두 지웠으며 앞으로도 올리지 않는다. 역겨워서 정말... 2017. 1. 1.
이현호, 13월의 예감 ... 한 장의 밤을 지우개의 맘으로 밀며 가는 내가 있다 너의 비문들을 나에게 다오 네게 꼭 맞는 수식을 붙이기 위해 괄호의 공장을 불태웠지만 어디에서 살아서는 깃들 수 없는 마음 네 앞에서 내가 선해지는 이유 애무만으로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 산다는 게 싫지 않았다 나를 스친 바람들에게 일일이 이름표를 달아주었지 너에게 골몰하는 병으로 혀끝이 화하다 조용히 미쳐가고 있다 나는 2017. 1. 1.
성동혁, 1226456 성동혁, 1226456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네가 아침잠에서 깨어 방문을 열었을 때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별들 난 그 별을 함께 주워 담거나그 별에 상처 난 너의 팔을 잡아 주고 싶었다 지나 보면 역시나 난 할 줄 아는 게 없었는데 너에겐 특히나 그랬다 조용히 밥을 먹는 너보다 더 조용히 밥을 먹으며 너를 고요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의 고요한 아이야, 가끔은 시끄럽게 너와 선루프를 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정적이 찾아올 때벌거벗은 나의 등을 안아 주던 게 생각난다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네 머리를 쓰다듬고 강에 뛰어들고 싶다오래오래 허우적거리며 손의 감촉을 버리고 싶다 한 행성이 내게 멀어져 간 것은 재앙이다네가 두고 간 것들을 나만.. 2015.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