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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lit61

황인찬,종로사가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 2020. 10. 9.
심보선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0.1×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2020. 10. 9.
이현호, 성탄목 그 겨울 살풋 맞잡은 손안엔 별이 살았다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세모꼴의 찻길을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 나뭇가지들 사이로 어둠살에 갇힌 차량의 불빛들 반짝이고 희미한 바람에 실려 공중을 떠돌던 마른 눈송이들이 그 조감도를 맴돌 때 언젠가 저렇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 깍지 낀 손안의 별은 지구에서 가장 환한 성냥불 그 빛가로 애인의 머리가 함박눈같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맘속에 이 별이 다녀갈만큼 큰 굴뚝을 지어주었다 꼬마전구들을 별무리처럼 휘감은 겨울나무가 계절을 잊고 이른 꽃순을 피워올렸다 그것뿐이었던 그 겨울 너에게 이현호, 성탄목 2020. 10. 9.
이제니, 블랭크하치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 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 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태양의 눈은 마흔다섯 개. 내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로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마음을 읽는 연습을 했지.. 2020. 10. 9.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 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2020. 10. 9.
송승언, 액자소설 네가 잘 때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된 책을 읽었고 네가 깨어났을 때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물에 갇힌 사람이 건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건물에 갇힌 사람만 살아남는 이야기였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아팠어 읽어보진 않겠지만 분명 슬픈 이야기겠지 너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고 우리는 함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우리의 작은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았다 고가도로 아래 흘러가는 내로 물오리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래도 좋구나 말했다 좋은 세상이야 아무것도 새롭지 않지만 그런데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이야 그 소설이 말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묻자 무슨 소설? 하고 되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모든 게 이미 겪은 일처럼 느껴져 말하며 불안해하자 그렇지 않아.. 2020. 10. 9.
정끝별, 끝없는 이야기 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성 택시, 내가 사려다 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세 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열쇠 수리공은 왜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왜 패를 잘못 읽었고 시계공은 왜 깜빡 졸았을까 하필 그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 그때는 왜 하필 그대였을까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 2020. 10. 9.
이현호, 새로 쓰는 서정시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이 밤 형광등과 별과 달과 후색(後生)의 연애까지 가닿지 못하는 종이 위엔 너뿐. 수심 장의 파지 속엔 일순 삶을 끊어낸 수백 그루 나무, 발못 잃은 수천의 새들, 쫓기는 생의 눅진함을 쉬던 산짐승의 그늘이 수만 평 젖어 있다. 그들이 올려보던 별자리가 너의 얼굴이다. 나의 아비와 그 아비의 우주에도 다만 너뿐이어서, 그리움이 낙엽 타는 냄새처럼 코끝을 울리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나의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나의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 번 찍고 가는 눈과 비. 너에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그들 몸에 아로새겨진 음양의 봄가을이 너의 향내다. 붉은 인주로 밀입국.. 2020. 10. 8.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두 눈을 감아도 햇빛은 가득하다. 너는 순도 낮은 네 잠을 감시하며 꿈속의 거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린다. 한낮의 반대편은 자정이다. 자정과 정오가 바뀌듯 너의 몸은 조금씩 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의 겹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다. 풀밭 위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간다. 어떤 시간이 어떤 얼굴을 데려온다. 다시 수요일이 온다. ​ ​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2020. 9. 30.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p.157 ​ "당신이 언제까지나 나에게 낯설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서투름은 나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익숙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나의 삶임을,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순간, 꽃처럼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것이 또한 진실임을, 한없이 차오르는 것과 한없이 비어가는 것의 동일한 무게를,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의 직선과 곡선들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그 친밀하고도 낯선 엉망진창의 뒤엉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 ​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2020. 9. 30.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22. 어렸을 때 나는 사랑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아주 깊은 속에 있는 아주 내밀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게 옮겨주듯 말해주는 것, 비밀을 나눠 갖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는 알아듣는 것이 사랑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인 오빠들 속에서 섞여 성장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힘겹게 내 마음을 말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버렸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좀더 자라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 2020. 9. 30.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2020. 9. 30.
정세랑, 피프티 피플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p248 2020. 9. 30.
유희경, 겨울은 겨울로 온다 우리는 그럴 건데 그렇게 될 텐데 자꾸 그러할 것인데 멈추지 못하고 하찮은 것들을 바라게 된다 아무도 없을 땐 그러다 누가 있기라도 하면 바닥이 바닥을 덮고 그 위를 손으로 쓸어보는 마음 그래도 어쩌면 이렇게 아무도 한 사람도 남아 있지를 않을까 나는 자박거리는 지난겨울 닮은 것들을 여미고 감추고 바람이 가라앉지 않는 건너편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겨울은 서로 닮아서 가운데 그쯤 누가 있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렵지 눈이 내렸고 쌓였고 그쳤고 녹기도 했으며 한 자 한 자 오래 걸려 적는 사람처럼 당신이 있다 나는 거기까지 오래오래 걸어다녀온 기분, 그랬다 /유희경, 겨울은 겨울로 온다 2020. 9. 30.
최은영, 손길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그 룰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꽃이 필 때 웃고 비둘기가 마술사의 손등에 앉아 있을 때 감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면, 사실 사라졌다는 것이 너무도 교묘한 트릭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언젠가 다른 마술들처럼, 마술사의 손길이 닿아 영영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2020.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