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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최승자 2020. 11. 3.
이제니. 나선의 감각-공작의 빛 꿈 없이 잠들고 꿈 없이 깨어나는 날들이다. 흐릿하고도 명확한. 명확하고도 흐릿한. 몇 개의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고요해 보여서 좋구나. 봄의 시작. 꽃들은 피어나고. 새들은 날아오르고 주어 없는 시간들. 노래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길게 이어지다 끊어지는. 끊어지다 다시 이어지는. 네 연약한 내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시 시작되는. 노래들. 대화들. 기억들. 정화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너를 통해서 나를 본다는 것은 이런 빛깔인가. 멀리서 손 내밀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안다는 것은. 멀리서 이미 다가왔던 얼굴을 뒤늦게 본다는 것은. 기억은 중첩된 채로 펼쳐지고. 수면 위로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다. 꿈속의 꿈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꿈밖으로 사라지는 꿈들 속.. 2020. 10. 9.
박지혜, 초록의 검은 비 그가 죽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온종일 울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려면 이제부터 다른 문을 찾아가야 한다 원을 그린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를 기다린다 그가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가 행복한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착하게 밥을 먹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가 달개비꽃을 보고 소년처럼 기뻐한다 그가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작은 종을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그가 흔드는 종소리처럼 불안한다 나는 그처럼 한 번 두 번 종을 흔든다 종소리는 굳은 표정처럼 외로운 온기처럼 슬프다 그.. 2020. 10. 9.
나희덕, 불투명한 유리벽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누가 기억의 스위치를 누른 것일까 그러나 이내 네 얼굴은 꺼지고 사방에서 깨진 유리 알갱이들이 모여들었지 네가 쓰다 만 페이지, 자동차 바퀴가 멈춘 곳에서 유리벽은 자라나 점점 불투명해지고 단단해졌어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아,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아침 거기 춥지 않아? …… 어둡지 않아? ……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지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감긴 네 눈을 다시 감겨주고 닫힌 네 입술을 다시 어루만져주고 굳은 네 손과 발을 다시 쓸어주고 식은 네 가슴에 흰 꽃을 다시 놓아주듯이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어 물을 .. 2020. 10. 9.
김경미, 겹 1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밖에는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김경미, 겹 2020. 10. 9.
황인찬,종로사가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 2020. 10. 9.
심보선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0.1×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2020. 10. 9.
이현호, 성탄목 그 겨울 살풋 맞잡은 손안엔 별이 살았다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세모꼴의 찻길을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 나뭇가지들 사이로 어둠살에 갇힌 차량의 불빛들 반짝이고 희미한 바람에 실려 공중을 떠돌던 마른 눈송이들이 그 조감도를 맴돌 때 언젠가 저렇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 깍지 낀 손안의 별은 지구에서 가장 환한 성냥불 그 빛가로 애인의 머리가 함박눈같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맘속에 이 별이 다녀갈만큼 큰 굴뚝을 지어주었다 꼬마전구들을 별무리처럼 휘감은 겨울나무가 계절을 잊고 이른 꽃순을 피워올렸다 그것뿐이었던 그 겨울 너에게 이현호, 성탄목 2020. 10. 9.
이제니, 블랭크하치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 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 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태양의 눈은 마흔다섯 개. 내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로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마음을 읽는 연습을 했지.. 2020. 10. 9.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 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2020. 10. 9.
송승언, 액자소설 네가 잘 때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된 책을 읽었고 네가 깨어났을 때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건물에 갇힌 사람이 건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건물에 갇힌 사람만 살아남는 이야기였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아팠어 읽어보진 않겠지만 분명 슬픈 이야기겠지 너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고 우리는 함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우리의 작은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세상을 보았다 고가도로 아래 흘러가는 내로 물오리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지만 그래도 좋구나 말했다 좋은 세상이야 아무것도 새롭지 않지만 그런데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이야 그 소설이 말하려던 건 무엇이었을까? 묻자 무슨 소설? 하고 되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모든 게 이미 겪은 일처럼 느껴져 말하며 불안해하자 그렇지 않아.. 2020. 10. 9.
정끝별, 끝없는 이야기 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성 택시, 내가 사려다 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세 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열쇠 수리공은 왜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왜 패를 잘못 읽었고 시계공은 왜 깜빡 졸았을까 하필 그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 그때는 왜 하필 그대였을까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 2020. 10. 9.
이현호, 새로 쓰는 서정시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이 밤 형광등과 별과 달과 후색(後生)의 연애까지 가닿지 못하는 종이 위엔 너뿐. 수심 장의 파지 속엔 일순 삶을 끊어낸 수백 그루 나무, 발못 잃은 수천의 새들, 쫓기는 생의 눅진함을 쉬던 산짐승의 그늘이 수만 평 젖어 있다. 그들이 올려보던 별자리가 너의 얼굴이다. 나의 아비와 그 아비의 우주에도 다만 너뿐이어서, 그리움이 낙엽 타는 냄새처럼 코끝을 울리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나의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나의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 번 찍고 가는 눈과 비. 너에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그들 몸에 아로새겨진 음양의 봄가을이 너의 향내다. 붉은 인주로 밀입국.. 2020. 10. 8.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두 눈을 감아도 햇빛은 가득하다. 너는 순도 낮은 네 잠을 감시하며 꿈속의 거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린다. 한낮의 반대편은 자정이다. 자정과 정오가 바뀌듯 너의 몸은 조금씩 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의 겹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다. 풀밭 위로 검은 그림자가 흘러간다. 어떤 시간이 어떤 얼굴을 데려온다. 다시 수요일이 온다. ​ ​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2020. 9. 30.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p.157 ​ "당신이 언제까지나 나에게 낯설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서투름은 나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익숙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나의 삶임을,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순간, 꽃처럼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것이 또한 진실임을, 한없이 차오르는 것과 한없이 비어가는 것의 동일한 무게를,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의 직선과 곡선들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그 친밀하고도 낯선 엉망진창의 뒤엉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 ​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2020.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