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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22. 어렸을 때 나는 사랑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아주 깊은 속에 있는 아주 내밀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게 옮겨주듯 말해주는 것, 비밀을 나눠 갖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는 알아듣는 것이 사랑이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인 오빠들 속에서 섞여 성장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힘겹게 내 마음을 말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버렸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좀더 자라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 2020. 9. 30.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 2020. 9. 30.
정세랑, 피프티 피플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혜련은 기가 막혀서 혼자 더 웃었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p248 2020. 9. 30.
유희경, 겨울은 겨울로 온다 우리는 그럴 건데 그렇게 될 텐데 자꾸 그러할 것인데 멈추지 못하고 하찮은 것들을 바라게 된다 아무도 없을 땐 그러다 누가 있기라도 하면 바닥이 바닥을 덮고 그 위를 손으로 쓸어보는 마음 그래도 어쩌면 이렇게 아무도 한 사람도 남아 있지를 않을까 나는 자박거리는 지난겨울 닮은 것들을 여미고 감추고 바람이 가라앉지 않는 건너편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겨울은 서로 닮아서 가운데 그쯤 누가 있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렵지 눈이 내렸고 쌓였고 그쳤고 녹기도 했으며 한 자 한 자 오래 걸려 적는 사람처럼 당신이 있다 나는 거기까지 오래오래 걸어다녀온 기분, 그랬다 /유희경, 겨울은 겨울로 온다 2020. 9. 30.
최은영, 손길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그 룰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꽃이 필 때 웃고 비둘기가 마술사의 손등에 앉아 있을 때 감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면, 사실 사라졌다는 것이 너무도 교묘한 트릭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언젠가 다른 마술들처럼, 마술사의 손길이 닿아 영영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2020. 9. 30.
최은영, 모래로 지은 집 중 그 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싶었다. 만약 내 옆에 모래가 있었더라도 나는 똑같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최은영, p159 2020. 9. 30.
양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사람들 앞에서 웃으려 애쓰다 보니 마음을 감추는 데에 익숙해졌다 누가 안부를 물으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하염없이 낮과 밤이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이고 싶은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야가 멈추지 않았다 2018년 10월 양안다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작가의 말 2020. 9. 30.
조연호 배교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는다 ​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 ​ 조연호, 배교 2020. 8. 16.
폴 베를린느, Green Green 그린 Voici des fruits, des fleurs, des feuilles et des branches 열매, 꽃, 잎, 가지들이 여기 있소 Et puis voici mon coeur qui ne bat que pour vous.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소. Ne le déchirez pas avec vos deux mains blanches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Et qu'à vos yeux si beaux l'humble présent soit doux.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J'arrive tout couvert encore de rosée 새벽 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Que le vent .. 2020. 8. 4.
여성의 현실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삶의 영역 안에 숨겨져 있었다 '사생활'이라고 칭송받는 가치들은 의식에 강력한 장벽을 형성하였고, 따라서 여성의 현실은 사실상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성생활과 가정생활의 경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모욕과 비웃음, 불신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여성들은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게 되었고, 여성의 침묵은 성과 가정 내의 어떠한 착취도 합법적인 것으로 둔갑시켰다. 여성에게는 사적인 삶의 포악성에 붙일 만한 이름이 없었다. 공적 영역에서 이미 잘 마련되어 있는 민주주의가 가정에서의 원시적인 폭정이나 교묘한 독재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부활하는 미국 여성 운동의 초기 선언서에서 베티 프리던이 여성의 문제를 "이름이 없는 문제"라고 부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초기 여성 운동의 방식을 '의식.. 2020. 8. 3.
박준, 희고 마른 빛 잠이 좋다. 사람으로 태어나 마주했던 고민과 두려움과 아픔같은 것들은 나는 대부분 잠을 통해 해결했다. 헤어짐의 아픔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끙끙 앓던 신열 같은 것들도 잠을 자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잠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꿈을 부른다. 부른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이 들 때까지 한가지 생각을 계속 떠올리는 것이다. 요즘 꿈에는 당신이 자주 보인다. 꿈의 장면은 흑백이고 당신은 말없이 돌아앉아 있거나 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날에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그럴때면 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궁금한 일들을 이것저것 묻기에 바쁘다. '살 만해?' 아니 '죽을만해?' '필요한 것은 없어?' '.. 2020. 6. 6.
검은여름, 김동하 (p.11) 여기서 더, 완전히 망가져버리고 싶은 밤이었다 아픈 가슴을 문지르자 총알 몇 발이 깊은 속에서 만져졌다 나는 예고도 없이 너를 생각했다 너와 나 가운데 누구를 먼저 쏴야 할까 수도세 미납 통지서에 네 이름을 끼워 넣다가 울고 말았다 슬펐던 건 네가 아니라 더 이상 세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시절은 가난했다 궁핍은 전능했고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버리고 싶었는데 왜 네 이름이 가슴에서 툭툭 떨어져 나갔는지 왜 글 때문에 잃었던 너를 떠올렸는지 내가 읽던 시집에도 듣던 노래에도 그러니까 나의 하루 곳곳에는 네 이름이 끼워져있었고 내 상처의 크기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의 크기라던 네 앞에 서서 계절 내내 앓고 싶었는데 뒤늦게 너의 현관을 두드리고 싶었.. 2020. 6. 6.
기형도, 10월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2020. 6. 6.
검은여름, 김동하 너의 계절로 가는 길은 꽃이 피지 않아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었고 때로는 침침한 유곡이었다 닮지 못한 연인들의 태가 전운으로 감기던 하늘의 공백은 지난밤 나누었던 우리의 입술이었다 내 마음이 급했다 침묵처럼 높게 뻗은 편백나무 숲을 지나 빗발 따라 소쩍새 우는소리 타박타박 걸어가는 어느새 외롭고도 지친 밤중이었고 먼 곳에서 보내온 첫사랑 따위의 낯간지러운 이름들 찾아 헤매던 여름날은 끝끝내 세월 속으로 반송되지 못한 서로 마음에 대한 기록이었다 조난이었다. 불안한 입술을 달싹이며 마지막을 발음하던 네가 수화기 너머로 울고 있었다. * 깊어가는 밤을 모르고 사랑을 좇기위해 이튿날까지 뒤엉키던 몸이면 우리는 좋았다. 좋은 꿈 꾸라는 너의 말과 함께 돌아눕던 새벽들이, 맞댄 등 사이로 나눈 서로의 체온 속에서.. 2020. 6. 6.
유지원 - 첫사랑, 여름 후덥지근한 교실의 여름과 절정의 여름, 레몬향이 넘실거리는 첫사랑의 맛이 나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나던 네 머리카락, 돌아갈 수는 없어도 펼치면 어제처럼 생생한, 낡은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단편 필름들. 말미암아 절정의 청춘,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 밤이면 얇은 여름이불을 뒤집어 쓴 채 네 생각을 하다가도 열기에 부드러운 네가 녹아 흐를까 노심초사 하며, 화성인들이 사랑을 묻거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마음 먹었다가도 음절마저 황홀한 석 자를 앗아가면 어쩌지 고민하던 그러니 따끔한 첫사랑의 유사어는 샛노란 여름 2018 제 26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중등부 시 부문 동상 수상작 첫사랑,여름- 서울동국대 사대부중2 유지원 2020. 2. 3.